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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0년대 초반, 스물셋.
나는 그토록 원하던 전역했다.

이때만 해도 세상이 내 발밑에 있는 줄 알았다.
당시 유행했던 것이 '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', '말하는 대로 된다' 같은 자기계발서 류의 문구들이었다.
온 세상이 그런 말들로 도배되어 있었기 때문에, 전역을 앞둔 100일 전부터 내 머릿속은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가득 찼다.
제대하면 돈도 엄청나게 벌고, 클럽이든 거리든 여자들을 다 후리고 다닐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망상만 했다.

물론 근거있는 자신감이었다.
부끄럽지만 내 얼굴은 연애를 쉬지 않을 정도로 나쁘지 않았고, 키는 원래 컸다. 상병 초때 여친이 바람나서 헤어진 뒤로는 독기가 올랐다.
그날부터 PX는 끊고 프로틴만 쳐먹으며 운동까지 죽어라 했으니 하드웨어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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바로 독립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선언했다.
그 당시의 나는 내가 엄청나게 철이 들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.
그래서인지 부모님도 어느정도 믿어주고 방을 하나 구해 주셨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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하지만 기대와 달리, 독립하고 나서 친구에게 롤이라는 게임을 배우고 나서는 인생이 완전히 꼬였다.
반년 가까이 방구석에서 피시방을 전전하며 백수 짓을 했다.

티어는 다이아까지 올릴 수 있었지만, 현실은 점점 시궁창이되어갔다.
슬슬 통장 잔고 바닥을 치고, 두 끼를 계란 넣은 라면으로 연명할 때쯤 되어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.

“돈…돈이 있어야 돼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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알바 구인 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세상에 별의별 알바가 다 있었다.
하지만 한 달 내내 허리가 휘어지도록 일해도 그 당시 시세로는 150만 원도 주는 곳이 드물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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"에이, 그래도 내가 낸데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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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급전사 군필, 그리고 이 피지컬로 이런 최저시급 알바를 할 순 없었다.
스크롤을 내리다보니 솔깃한 공고 하나가 화면에 박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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[초보 환영 / 고수익] 금융 TM 부서 사원 모집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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근무 조건: 주 5일, 09:00 ~ 17:00 (자율근무 가능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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급여 조건: 기본급 + 각종 수당 + 인센티브 + 대기업 복지 (평균 300~400만 원, 상위권 월 1,000만 원 이상 가능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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교육 혜택: 한달 교육 기간 중 교육비 지급!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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특이사항: 영업 경험 없는 초보 대환영. 열정만 있으면 됨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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평균 300? 잘 벌면 1,000만 원?
상방이 뚫려 있다고?
이걸 안 할 이유가 없었다.
거기다 그 당시 300이면, 대기업 들어갔다고 집안의 자랑이던 사촌 형의 신입 월급보다 훨씬 많은 돈이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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열정하면 원래 임현욱 바로 나였다.
고민할 시간도 아까워 곧바로 이력서를 작성해 면접 날짜를 잡았다.

[오후에 바로 면접 가능하시죠? 편한 복장으로 오시면 됩니다.]

수화기 너머로 들린 실장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무슨 9시 뉴스 아나운서처럼 나긋나긋하고 친절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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난 당장 샤워를 하고, 전역 기념으로 부모님이 맞춰주셨던 정장을 꺼내 입고 면접 장소로 향했다.
생각보다 빌딩 안의 회사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.
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다들 귀에 헤드셋을 끼고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대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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얼떨떨하게 데스크에 서 있는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면접실.
안에는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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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어서 오세요. 현욱 씨 맞죠?”
“네, 안녕하십니까.”
“씩씩해서 좋네요. 곧 지점장님 오시니까 앉아 계세요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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실장이라는 여자의 눈웃음부터가 장난이 없었다.
반쯤 휘어지며 웃는게 괜히 가슴이 살랑거렸다.
그러고 보니 게임만 하느라 여자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.
같이 있어그런지 면접실 냄새도 좋고, 공기마저도 달달한 것 같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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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으셨고요?”
“네, 그렇습니다.”
“어머, 말투가 너무 딱딱하시네요. 군인 같아요. 전역한 지 얼마 안 됐어요?”
“반년쯤 됐는데, 이게 편합니다.”
“하긴, 듬직하긴 하네요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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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내 어깨와 몸을 슥 훑어내렸다.

얼마 지나지 않아 50대 남자인 지점장이 들어왔고, 본격적인 형식의 면접이 진행됐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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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편하게 자기소개 해주세요.”
“안녕하십니까! 군대에서도 특급전사였고, 체력도 좋고, 특히 열정이 가득해서 뭐든 열심히 잘 팔아보겠습니다!”
“역시…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제맛이라니까. 박 실장?”
“그러네요. 신입사원답게 패기가 넘쳐서 아주 좋아요.”
“감사합니다!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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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점장이 흡족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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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현욱 씨는 공고 보고 어떤 일인지 대충 알고 왔어요? 우리 회사가 보험 쪽인 건 알죠?”
“네! 영업이라고 들었습니다.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겠습니다!”
“아, 우리가 보험 영업은 맞는데 발바닥에 땀날 일은 없고… 그 TM이라고 해서, 텔레마케팅 들어봤어요? 그중에서도 아웃바운드인데……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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알고 보니 무슨 회사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무작정 지원했던 셈이다.
대면으로 직접 만나러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, 사무실에 앉아 전화로 고객을 설득하고 계약을 체결한 뒤 그 건수에 따라 돈을 받는 구조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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다행인 건, 그 방식의 차이만 빼면 공고에 적힌 대로 300~1,000만 원씩 벌어가는 직원들이 수두룩하다는 거였다. 개인이 한 만큼 고스란히 가져가는 능력제 사업자라고 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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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잘 몰랐지만, 악바리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.”
“좋네. 근데 여기가 조금 뭐랄까, 남자가 거의 없어서 적응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… 첫 직장이라고 했나요?”
“예, 사회생활은 처음이지만 자신 있습니다.”
“박 실장님, 요새 분위기 올릴 만한 실이 몇 실이지?”
“저희 3실입니다.”
“아… 3실…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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지점장의 얼굴에 잠깐 동안 미묘한 안쓰러움과 묘한 웃음이 스쳤다. 그러곤 나를 향해 물었다.

​

“여자가 열 명이 넘어도, 여초 회사 잘 다닐 수 있어요?”
“예, 그렇습니다!”

​

땀내와 찌든 짬내만 진동하던 군대 고추밭에서도 2년을 꿋꿋이 버텼는데, 분내나는 여초 직장이 힘들면 얼마나 힘들겠나 싶었다.

​

“자신 있다는 거죠?”
“네! 친한 누나들도 많고 여동생들도 많아서 대화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. 뭐든 다 잘 도울 수 있습니다.”
“그럴 것까지는 없고… 그럼 내일 당장 출근 가능해요?”
“네, 그렇습니다!”
“축하해요. 내일 뵙죠.”

​

지점장이 껄껄 웃으며 악수를 내밀었다. 그러곤 내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치고는 면접실을 나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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박 실장도 픽 웃으며 자리를 정리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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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전 박미영 실장이에요. 현욱 씨는 아마 한 달 교육받고 우리 3실로 배정될 거예요. 미리 잘 부탁해요.”
“네, 실장님.”
“아까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했죠? 진짜… 뭐든?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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마지막에 던진 그 한마디가 어딘가 서늘하면서도 음흉하게 들렸다.

​

“네, 뭐든 잘하겠습니다.”

​

그렇게 나는 이력서 한 장 들고 보험사 TM 부서에 입성했다.
3실의 유일한 청일점으로.

​

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다.
전역할 때 내가 다짐했던 돈과 여자 중 반은 확실히 성공할거라는 사실을.

물론 돈은 아니었다.



+98%실화, 2% 과장입니다.
이름은 만약을 위해 가명으로 바꾸겠습니다.

보험회사 청일점 썰 1

555 2026-10-20